Album (사진)/사찰여행

용주사를 찾아서 (화성 龍珠寺)

法雨_김성근 2012. 7. 23. 23:30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 이름은 산 1752~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이름은 선, 그의 이복 兄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가 40세가 넘어 낳은 아들이기 때문에 태어난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 고종때 莊祖로 추존됨]의 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願刹)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英祖 1694~1776)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전국 5규정소(糾正所: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습니다.

  또한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1790년 창건 당시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름다운 전각이다. 특히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삼세여래후불탱화는 조선 중기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장대석을 쌓아 성역공간을 마련하고 중앙에 대우석(大隅石)을 설치한 6단의 계단을 두었고, 대우석은 보통의 경우, 사찰에서는 연꽃무늬·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하는데 용주사는 이와 달리 삼태극(三太極)· 비운(飛雲)·모란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목조 삼세불좌상 (三世佛座像)      左 아미타불     主佛 석가모니불,     右 약사여래불

대웅보전내의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입니다.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협시하는 삼세불로서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는데 재질은 목조이고 높이 110㎝로 2006년에 개금하였습니다.

모두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풍만한 얼굴에 짧은 목, 약간 앞으로 숙인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갖추고 있습니다. 나발에는 정상계주(頂上珠)와 중간계주(中間珠)가 크게 박혀있고 옷주름은 굵고 두터운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습니다. 수인은 석가여래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魔王) 파순(波旬)을 물리치는 항마촉지인, 아미타불이 극락세계에서 대중에게 설법하는 설법인, 그리고 약사여래는 왼손에 약그릇을 들고 오른손은 설법인을 하고있습니다 .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幢畵)

대웅보전의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입니다. 세로 440㎝, 가로 35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합니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신광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주형(舟形)으로 처리하였습니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에 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시립해 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숭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한편 하단 중앙의 문수·보현보살 사이에 은자서(銀字書)의 축원문이 적혀있어 후불탱화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면의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역시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좌우에는 화불(化佛)이 보이고 곳곳에 여러 제자와 천녀상이 위치하여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불화는 원칙적으로 한치의 여백도 없이 꽉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한 불화는 마땅히 빈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축원문 내용 :

주상전하 수만세(主上殿下 壽萬歲) 왕비전하 수만세(王妃殿下 壽萬歲) 자궁저하 수만세(慈宮邸下 壽萬歲) 세자저하 수만세(世子邸下 壽萬歲)

 

 

  대웅전의 용머리 및 문(門)의 벚꽃살무늬


  천불전(千佛殿)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多佛思想)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現劫千佛)을 이루고 있으며, 누구나 수행하면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법화경(法華經)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건물은 석조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졌으며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마지막 아홉 번째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하였습니다.

  천불전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였습니다.

이 삼세불은 대웅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하여 조성한 것으로 머리 한가운데에는 붉은 계주를 넣었습니다.

 

  관음전 (觀音殿)효행교육원(孝行敎育院)

  관음전 내부의 관세음보살상

 

 

 

  지장전(地藏殿)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冥府殿)이라 합니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도명존자(道明尊者)와 무독귀왕(無毒鬼王)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모시며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합니다.
이밖에 판관(判官)·녹사(錄事), 그리고 입구에 장군(將軍) 등을 모시게 됩니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이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몸을 육도(六道)에 나타내어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의 보살입니다. 자신의 성불을 미루면서 악도에서 헤매거나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까지 그 스스로가 성불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 보살이기에 대원본존(大願本尊)이라 이르기도 합니다.

 이 지장보살은 원래 천관을 쓰고 가사를 입으며, 왼손에는 연꽃을 쥐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삭발한 머리에 석장(錫杖)을 짚고 여의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많습니다.

 

  용주사 지장전은 정면에 자리한 지장보살과 좌우에 협시한 도명존자·무독귀왕의 지장삼존상을 마주

하게 됩니다.

중앙의 지장보살은 민머리(僧形)에 지물(持物)은 육환장을 들고 있으며 몸체는 어깨가 좁고 그 경사가 급하여 움츠린 듯한 인상을 줍니다.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좌우에는 명부시왕 10구와 판관 4구, 사자(使者) 2구, 그리고 인왕상 2구가 있는데 이들은 1894년 만의사(萬儀寺)의 지장전이 퇴락하여 이곳 용주사에 모셔온 것이라고 합니다.

 

시왕은 저승의 십대왕을 지칭하는데 중생이 죽으면 생전에 지은 죄를 이들 앞에서 심판받게 됩니다. 모두 관을 쓰고 홀(忽)을 들고 있는 왕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시왕의 명칭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제 1진광대왕(秦廣大王), 제2 초강대왕(初江大王), 제3 송제대왕(宋帝大王), 제4왕 오관대왕(五官大王),

제5 염라대왕(閻羅大王), 제6 변성대왕(變成大王), 제7 태산대왕(泰山大王), 제8 평등대왕(平等大王),

제9 도시대왕(都市大王), 제10 오도전륜대왕(五都轉輪大王)

 

지장보살상의 뒤편에 봉안되어있는 지장탱화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시립하고 이 두 보처를 중심으로 명부시왕·사자·판관·장군·사천왕·천녀를 도설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7일마다 49일까지 일곱 번의 심판을 받고, 백일(白日)·소상(小祥)·대상(大祥)때가지 각각 한차례씩 모두 합쳐 10번을 10명의 대왕에게 생전의 죄업을 고백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살아 생전 비록 죄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열 번의 기회를 통해 가능한 한 구제 받도록 하는 자비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모든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제한 후에야 깨우침을 이루겠다는 지장보살의 대원력은 결국 저승의 세계가 아닌 이승의 세계에서 선근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호성전(護聖殿)과 부모은중경탑(父母恩重經塔)  

  정조대왕께서는 일반적인 제사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륭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 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왕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때마다 49재(영산재)를 베풀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신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호성전 안에 모셔져 있는 사도세자(장조), 혜경궁홍씨(정조대왕 어머니), 정조대왕, 효의황후(왕비) 의 위패

 

  부모은중경탑(父母恩重經塔)에 새겨진 부모은중경의 일부 (서예가 김충현 글씨)

 

  천보루(天保樓, 경기도 문화재 제36호) 와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삼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면 한 눈에 대규모의 누각이 정면에 나타납니다.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인데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하였습니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입니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됩니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삼문과 천보루 사이에는 효행박물관 앞의 5층석탑과 함께 또하나의 5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 5층석탑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으며 기단갑석 위에는 옥신고임으로 처리 되었습니다 .

옥개석은 처마끝선에서 약간 반전되었고, 옥개받침은 3단씩입니다. 전체적인 옥개석의 체감은 비율이 작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천보루(千保樓)와 홍제루(弘濟樓)     특이하게도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안쪽에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있습니다.

 밖에서는 천보루, 안에서는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집니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홍제루 현판의 동쪽 종루(從樓) 벽면에는 일제강점기에서 이름있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을 비롯한 30인의 문인묵객들이 당시 강대련 주지를 위해 기념휘호한 글들을 모아 판각해놓은 목판이 걸려있습니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칠성과 산신, 독성이 탱화로 모셔진 곳으로 칠성(七星閣)각의 다른 이름이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우리는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용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됐던 것입니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합니다. 각각의 신을 따로 모셔 칠성각, 산신각, 독성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三聖閣)이라고 하여 이들 세 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합니다.

 

 

칠성탱화(七星幢畵)

화면 중앙에 치성광여래가 연화대좌 위에 결가부좌하였고, 좌우보처로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시립하였습니다. 상단 좌우에는 칠여래가 있고, 하단 좌우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이 있습니다.

원래 칠성신은 중국의 도교신앙에서 형성된 후 우리나라에 유입되어서는 여러 신중(神衆)의 하나로 보고 신중탱화 속에서만 묘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부터 칠성에 대한 신앙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독립된 신앙형태를 지니게 되었고, 그에 따라 신중탱화에서 분화된 별개의 칠성탱화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칠성의 주불(主佛)인 치성광여래는 가람수호의 기능과 함께 약사여래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여 자식이 없거나, 아들을 기원하거나, 또는 자식의수명을 비는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받고 있습니다.

 

  범종각(梵鐘閣)과 범종 (梵鍾, 국보 제120호)     

 종의 정면 아래 부분에 연꽃을 아로새긴 당좌(唐座, 종을 치는 부분)와 종신의 양쪽 옆에 자리한 비천상을 대할 수 있습니다. 고려초기의 범종이라고 하지만 드물게 보는 큰 규모이며 신라시대의 범종 양식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종의 정상부에는 신라 종에서 볼 수 있는 용뉴와 용통이 있습니다.

 용머리는 종 정상부의 보주(寶珠)를 물어서 두발로 종의 정상부인 천판(天板)을 잡고 종 전체를 들어 올리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용통은 연주문(連珠紋)을 돌렸습니다. 여섯 단으로 구분을 하고 당초문(唐草紋)과 연꽃잎으로 장식하였습니다.천판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상대와 하대의 무늬는 서로 다른 무늬를 하였습니다.

 상대의 경우 신라 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원권(半圓圈) 아래위에 서로 교대로 배치하고, 그 사이 사이에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종밑에 돌린 하대에는 연속된 당초 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또 하대의 무늬에 당초가 한번 돌아 갈 때마다 그 중앙에 8엽 내지는 9엽의 연꽃무늬를 독립하여 배치하고 유곽의 문양대는 안쪽과 바깥쪽의 작은 띠 주변에 연주무늬를 두르고 그 가운데에 서로 연결되는 당초무늬 띠를 둘렀습니다. 유두는 둥근 연꽃잎 위에 도드라져 각 유곽마다 아홉 개씩 있습니다. 종신 아래 둥그런 당좌의 가운데 부분은 8엽의 연꽃무늬를 새기고 그 밖으로 연주무늬띠를 도렸습니다. 그리고 연주무늬를 다시 두르고 가장 바깥의 띠에도 연주무늬를 돌려 새김으로써 마무리 하였습니다.
 종신에는 비천을 두 곳에 새겼고 그 사이 사이에는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삼존불상을 조각하였으며 보살의 천의(天衣)자락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 마치 천상세계에서 내려오는 듯한 형상을 보여줍니다. 종신의 비천상과 삼존불상의 사이에 추각(追刻)한 명문에 의하면 854년에 주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는 종의 형태가 고려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지 않고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 석(釋) 반야(般若)가 2만 5천근을 들여 조성하였다.
      금상(今上) 16년 9월 일 사문 염거(廉居) 연기(緣起)

 

  법고각(法鼓閣)   대웅보전 왼쪽에 위치하는 단칸 3평의 아담한 건물로 내부에 북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법고는 홍고(弘鼓)라고도 하며 보통 북이라고 합니다.  북은 예불과 의식에 쓰이는 사물(四物)의 하나로서 짐승세계의 중생들을 위하여 소리를 냅니다.   또한 북소리가 널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이 널리 퍼져 모든 이에게 참다운 이치를 전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불음각(佛音閣)    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한 불음각(佛音閣)에는 커다란 범종 하나가 걸려있는데 네면에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조식하여 넣었습니다. 이 범종은 1985년에 조성 되었는데 그 소리가 영롱하여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이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예불 때마다 울리는 긴 종소리의 여운은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중생의 귓가를 씻어내고 부처님의 미소 띤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말씀이 되어 혼탁한 하늘을 밝게 울려주고 있습니다.

 

  불음각 범종 밑에 설치된 항아리, 종성(鐘聲)의 울림이나 긴 여운을 낼 요량으로 묻어둔 듯....

 

  전강대종사 사리탑(田岡永信大宗師 舍利塔)  

  만공선사의 법맥을 이어 불조의 혜명을 밝히신 한국불교의 큰 스승으로,  2005년 열반 30주기를 맞이하여 사부대중의 뜻을 모아 수행과 위덕을 기리는 사리탑을 조성하였다.

 

  삼문(三門)    절의 첫 입구인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맞게 됩니다. 마치 양반집 대가 같기도 한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사도세자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지어진 절이기 때문에 이러한 건축양식을 지닌 것 같습니다.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르며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며 오른쪽 옆문에는 '中央禪院'의 현판이 세로로 걸려있습니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입니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입니다.
              龍蟠華雲(용반화운)  용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珠得造化(주득조화)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寺門法禪(사문법선)  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佛下濟衆(불하제중)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합니다.

삼문 앞에는 화마(火魔)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합니다.

 

   삼문(三門) 정면 도리 위에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로 '龍珠寺'라는

 현판이 자리하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있는 글씨가 인상적이다.

 

 사천왕문(四天王門)    불법을 보호하고 악귀의 출입을 막아 사찰의 청정함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만수리실(曼殊利室)   만수리실은 원래 선당(仙堂 또는 禪堂)이라고 하며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 운붕(雲朋)스님이 도편수를 맡았는데 총면적 86평으로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객실로 사용한다.

건물의 구조는 민가의 건물양식을 따르고 있어 특이하다.

 

  홍살문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護聖殿)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효행박물관(孝行博物館)  정조대왕이 기증한 부모은중경을 비롯, 보믈 제1095호 봉림사 아미타불 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 용주사가 소장하고 있는 격조 높은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효행교육원(孝行敎育院)   정조대왕의 효심에서 창건된 용주사의 성격이 잘 드러난 건물로서,

효행교육의 장소로 사용되며 현재 사찰의 각종 법회가 진행되고 있다.

 

  중앙선원(中央禪院)  한국불교의 선풍을 진작하고 있으며, 1969년 설립된 이후로 전강 큰 스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스님들의 수행정진이 계속되고 있는 곳이다.

 

  효행박물관 앞에 세워진 "솟대" 

 

 

  공양간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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