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本寺)인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義信)조사가 삼국통일을 기원하기 위하여 처음건립한 이래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금동미륵삼존불상을 갖춰 법상종의 3대 가람으로 발전하여 오던 중 임진왜란에 불타버려 조선 인조 2년(1624)까지 사명대사 및 벽암(璧巖)대사에 의해 다시 건립되고 보수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모악산 금산사, 금강산 발연사와 함께 미륵신앙의 요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경내 및 주변에는 국보급 3점, 보물 6점, 천연기년물 1점, 도지정 문화재 13점 등 다수의 지정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1990년에 청동미륵대불을 완성하고 2002년 개금불사한 100척의 금동미륵대불이 장엄한 모습으로 중생을 어루만지고 있다.
산중에는 70여개의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다 소실되고 10개만이 수도처로 유지되고 있으며, 속리산을 포함한 법주사 일원은 "사적 및 명승 제 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특히 국가브랜드위원회에서는 최근 법주사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연구 조사에 착수하였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 915호)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앞면 7칸·옆면 4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이 건물은 무량사 극락전, 화엄사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불전 중 하나이다.
대웅보전 내부에 모신 삼존불
벽암이 다시 지을 때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에 법신인 비로자나불, 왼쪽에 보신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인 석가모니불이 있다.
대웅보전 앞 뜰의 보리수나무(일명, 염주나무)와 열매
통일호국 금동미륵불 신라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해 모셨다. 그 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1872)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하여 불상을 몰수해 갔다.
일제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으로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 동란으로 중단되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미륵부처님이 완성. 회향되었다.
1986년 류월탄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기존 시멘트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본 딴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2000년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일월드컵행사의 성공 개최 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 2년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 회향법회를 갖게 되었다 (순금 3미크론 두께, 황금 80kg 소요)
일주문 "호서제일가람" 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보믈 제 216호)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볼록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으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암벽에 새긴 불상)이다.
이 불상은 화사한 연꽃 위에 걸터 앉고 큼직한 연꽃잎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어,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전설을 그렸다고 하는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긴 네무꼴의 큰 물통이다. 높이 94cm, 길이 446cm, 폭 240cm이다.신라 성덕왕 19년(720)에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법주사의 3,000 승도가 물을 저장하고 사용하였다고 하며,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은 간결한 모습이다.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에 의해 처음 건립되고 혜공왕 12년(776) 진표율사에 의해 고쳐 지어젔으며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1624년(인조 2년) 벽암대사가 다시 교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목조 관세음보살상
원통보전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으로 입힌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간단하고 단순·소박하지만 부피감이 있는 이 목조관음보살상은 임란후 제작된 조선후기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석연지(石蓮池, 국보 64호) 8각의 지대석(받침석) 위에 3단의 굄과 한층의 복련대를 더하고 그 위에 구름무늬로 장식된 간석을 놓아 거대한 석연지를 떠받쳐 마치 연꽃이 구름 위에 둥둥 뜬 듯한 모습을 조식한 걸작품으로 8세기경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연꽃은 더러운 흙탕물에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듯이, 우
리의 현실은 서로가 시기하고 모함하는 연못의 흙탕물과 같은 세상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착하게 생활하면 내세에는 극락세계에 태어난다는 불교의 윤회적인 교리를 표현한 것이라 한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의 지장보살상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뒷 뜰의 보리수나무
법주사 석조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보물 제1417호)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은 성불의 큰 서원을 가지고 몸과 뼈를 태우면서까지 아미타불 앞에 공양하는 보살로서 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강한 의지를 괘양하라는 뜻으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이 보살상은 모루돌 위에 다기(茶器) 모양의 그릇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조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그 밖의 부분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법주사희견보살상은 비록 얼굴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향로를 받쳐 든 전체적 구성미나 세부 조각수법이 독특한 조각상이다.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사자를 조각한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특수한 형태를 하고 있다.
등은 부처의 자비로 명랑한 생활을 하며 여러가지의 재앙(불교에서의 8난)을 예방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넓다란 8각의 바닥돌 위에 올려진 사자 조각은 두 마리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뒷발로 아래돌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아랫돌과 윗돌에는 각각 연꽃을 새겨 두었는데, 윗돌에 두 줄로 돌려진 연꽃무늬는 옛스러운 멋을 풍긴다. 현존하는 석탑, 석등에 조각된 사자중 가장 뛰어난 솜씨를 드러내고 있으며,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곳에 창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는데, 꾸밈을 두지 않아서인지 소박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석등을 세운 시기는 성덕왕 19년(720)으로 추측되며, 조금 큰 듯한 지붕돌이 넓적한 바닥돌과 알맞은 비례를 이루어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신라의 석등이 8각 기둥을 주로 사용하던 것에 비해 두 마리의 사자가 이를 대신하고 있어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을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는 물론 후대에 가서도 이를 모방하는 작품이 나타났다.
같은 절 안에 있는 법주사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약사전(藥師殿)
범종(梵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6호)
조선 순조 4년(1804) 7월에 대시주 1명과 15명의 일반시주자의 시주를 받아 4천근의 동으로 제작된 청동종이다.
종신 하단에는 “가경구년갑자칠월일대법주사대종중사천근” 이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고, 시주자와 당시의 주지, 만든이 등이 새겨져 있어 제작연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조선 후기의 종이다.
크기는 높이 212.5cm, 종신부 상단 지름 82cm, 종신부 하단 지름 140cm인데, 종신의 전체 선은 둔중한 편으로 양각의 횡선이 3줄 둘러져 종신을 크게 구획하고 있고 용뉴가 쌍룡으로 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범종으로 종신의 문양이 약하게 표현되는 등 주조기법이 뛰어난 편은 아니나 특히 명문이 있어 시주자, 당시의 주지, 제작자, 제작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고 사찰명이 새겨져 있는 등 보존가치가 높다.
팔상전(捌相殿, 국보 55호)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5층 목조탑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짓고 1968년에 해체·수리한 것이다.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이 5층목탑을 팔상전이라 이름 붙였다.
1층과 2층은 앞·옆면 5칸, 3·4층은 앞·옆면 3칸, 5층은 앞·옆면 2칸씩으로 되어 있고, 4면에는 돌계단이 있는데 낮은 기단 위에 서 있어 크기에 비해 안정감을 준다. 지붕은 꼭대기 꼭지점을 중심으로 4개의 지붕면을 가진 사모지붕으로 만들었으며, 지붕 위쪽으로 탑 형식의 머리장식이 달려 있다.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배를 위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주사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22.7m)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목조탑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법주사 사천왕문(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이 건물은 절을 지키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는 문이다.
정면 5칸·측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1칸은 입구이고, 양쪽 2칸은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하였다.
사천왕은 위로는 제석천(帝釋天)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八部衆)을 지배하면서 불법(佛法)을 믿고자 하는 중생을 수호한다고 한다.
법주사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법주사 사천왕 석등(四天王石燈, 보물 15호)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 로 보아 혜공왕(765-780 재위)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중창하던 때의 작품으로 추정 하고 있다.
화사석(불을 켜놓는 부분)은 8각으로 4면에 창(窓)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고, 지붕돌(석등의 위를 덮는 돌) 정상에는 보주를 받치고 있는 받침이 남아 있다.
법주사 철확 (보물 제1413호)
큰 사발의 형상을 한 법주사 철확은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 두께 10∼3㎝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외반된 전이 달린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법주사의 사세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철확은 국내에 전래되는 솥 중에서 가장 큰 무쇠솥으로서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거의 완벽한 조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 찰주刹柱라고도 함)
일반적으로 절(寺)을 사찰(寺刹)이라 말함은 절(寺)에 당간 즉, 찰(刹)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宗派)를 표시하기 위하여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호)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이곳 법주사에 행차했을 때(공민왕 11년, 1362년), 양산 통도사에 있는 석가모니의 사리 가운데 일부를 이 곳에 옮겨오도록 하여 봉안한 사리탑이다.
8각을 기본형태(八角圓堂形)로 하여, 상 ·중 ·하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리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윗면에 비스듬히 경사를 주었고, 가운데받침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윗받침돌은 솟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였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지붕돌은 윗면에 흐르던 급한 경사가 끝부분에 이르러 완만해 졌다. 머리장식은 큼직한 원받침을 두어 그 위에 보주(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바위 위에 쌓아 올린 이름모를 석탑
보은 속리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
속리산 법주사로 가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이가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이 소나무가 정이품송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조 10년(1464)에 왕이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었는데,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어 가마가 가지에 걸리게 되었다. 이에 세조가 “가마가 걸린다”고 말하니 소나무가 자신의 가지를 위로 들어 왕이 무사히 지나가도록 하였다 한다. 또 세조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리하여 세조는 이 소나무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정이품(현재의 장관급) 벼슬을 내렸고, 그래서 이 소나무를 정이품 소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소나무는 살아오는 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많은 비용을 들여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2월 강풍을 동반한 눈보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졌고, 또한 2004년 3월 폭설로 서쪽가지 3개소 및 남쪽가지 1개소가 훼손되어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다.
속리의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 전경
법주사 경내의 계곡
법주사 경내 소나무숲의 나무뿌리가 서로 뒤엉킨 모습
법주사 경내 느티나무 고목 고목 위에서 새로 가지를 뻗고 있음.
법주사 경내 밤나무의 굽이쳐 자란 모습
법주사 경내 계곡에서 만난 다람쥐, 가까이 다가가도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법주사 경내의 음료수대 : 바위에 구멍을 내 파이프를 연결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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