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시대
① 고구려
고구려가 불교를 수용한 것은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와 함께 경전과 불상을 보내면서부터이다. 이후 동왕 5년(375) 이불란사(伊佛蘭寺)와 초문사(肖門寺)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뒤에도 평양 구사(九寺·광개토대왕 2년) 등 여러 사찰이 있었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까지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사찰들이 고구려시대에 창건이 되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지상건물이 없어 당시의 가람 형태를 알 길이 없다. 단지 평양 청암리사지(靑岩里寺址)와 대동군 상오리사지(上五里寺址), 평원군 원오리사지(元五里寺址) 등을 통해서 추정할 뿐이다.
특히 청암리사지를 통해서 보면, 8각 목탑을 중심으로 동·남·북 세 곳에 각각 금당(金堂)이 있고(1탑(塔) 3금당(金堂)) 남쪽 앞으로 중문(中門)이 배치되었으며 북쪽 금당 뒤에는 강당(講堂)이 마련되어 회랑(回廊)이 중문에서 나와 각 금당을 지나 닿거나 금당과 강당사이를 지나는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가람 형태는 일본의 비조사지(飛鳥寺址)가 있을 뿐이며, 이 비조사지에서는 탑의 기단이 정방형(正方形)을 하고 있다. 또한 후대(後代)의 것이긴 하지만 남원의 만복사지(萬福寺址)에서도 이와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중앙의 목탑은 정방형이고 탑 동·서의 건물도 탑을 향하지 않고 남향을 하고 있어 고구려의 가람 형태는 특이할 만 하다.
② 백제
침류왕 원년(384) 마라난타(滅難陀)에 의해 수용된 백제 불교는 최초의 것인 한산주의 사찰(寺刹)이 남아있지 않아 초기의 가람형태는 알 수 없다. 이후 공주·부여·익산으로 남하하면서 불교는 더욱 발달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가람의 형태도 그 틀을 이루게 된다.
백제의 가람 형태는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 미륵사지(彌勒寺址) 등과 같은 평지가람(平地伽藍)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먼저 군수리사지는 목탑지(木塔址)로 보이는 정방형의 기단을 중심으로 북편에는 금당과 강당을 남쪽에는 중문을 남북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1탑 1금당의 일본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에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정림사지는 1탑 1금당을 기본으로 중문·탑·금당·강당을 남북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있다. 금강사지 역시 앞의 두 가람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는데, 이는 부여를 중심으로 주류를 이루었던 1탑 1금당 형태로 백제가람을 특징짓고 있다.
하지만 익산 미륵사지에서는 이와는 다른 독특한 가람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북쪽에 동서로 나란히 3개의 금당이 놓이고, 또한 탑도 그 남쪽에 각각 나란히 배치된 삼탑식삼금당(三塔式三金堂)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는 1탑 1금당의 기본 양식을 바탕으로 세 개의 구조를 한 곳에 모여놓은 것이라 하겠다. 이와 함께 금당 밑으로 지하공간시설(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과 연결)을 하고 있어서 통일신라시대의 감은사지(感恩寺址)와 연결된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주목된다. 이와 같은 형태를 통해서 백제만의 가람을 구분 짓는 구조를 이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신라
5세기 중엽 묵호자에 의해 신라에 처음 들어왔지만, 공식적인 수용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로 세워진 천경림(天鏡林)의 흥륜사(興輪寺)가 세워진 이후라 할 수 있다. 신라의 가람 형태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남북 자오선상에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배치된 1탑 1금당식의 계통이다.
그러나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의 경우 좀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1탑 3금당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가람 구조에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강당(講堂) 및 중문(中門)의 좌우에서 나온 회랑(回廊)은 금당 좌우에 회랑과 만나지 않고 그냥 동서로 뻗어지고 있는 특이한 신라만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밖에 고선사지(高仙寺址)에서는 탑과 금당이 분리되어 또 다른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단탑식 배치인데도 중문(中門) 다음에 바로 금당(金堂)과 강당(講堂)의 순으로 배치되어 회랑(回廊)에 싸여 있으며 탑은 금당과 중문 사이에 해당하는 서쪽의 회랑밖에 독립된 회랑을 갖고 배치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신라의 가람 형태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다양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2)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삼국통일 후 많은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게 되는데, 이는 가람 형태의 변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먼저 금당 앞에 놓이는 단탑이 쌍탑(雙塔)으로 바뀌게 된 것을 들 수 있다.(쌍탑단금당식(雙塔單金堂式)) 대표적인 예로 쌍탑식 가람 형태의 시원(始原)으로 알려진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를 비롯하여 감은사지(感恩寺址), 망덕사지(望德寺址), 화엄사(華嚴寺), 실상사(實相寺) 등등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평지가람(平地伽藍)에서 점차 산지가람(山地伽藍) 형태로 변화해 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9세기 이후 선종의 유행으로 지세(地勢)의 제약과 경영상의 문제를 들어 가람의 위치가 점차 산지로 이동해 간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이전의 엄격한 가람 형태(예: 회랑)는 점차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로는 평지가람과 산지가람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감은사지(感恩寺址)·불국사(佛國寺) 등에서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이러한 산지가람 형태는 고려와 조선에 영향을 주어 대부분의 사찰이 산지에 위치하게 된다.
3) 고려시대
평지가람이든 산지가람이든 모두 단탑식 가람 형태를 따르고 있다. 가람의 방향도 대부분이 남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북향을 하고있는 충북 중원군의 미륵대원이나, 고려시대 가람 형태와는 조금은 다른 만복사지가 있어 주목을 끈다.
남원의 만복사지(萬福寺址)는 중문·탑·금당 순으로 형태로 탑의 서쪽에 또 하나의 금당이 있는 서전동탑식(西殿東塔式)의 특이한 가람형태를 보이고 있다.
4) 조선시대
대부분 산지가람이며 모두 단탑식 가람 형태를 이루고 있다. 불상이 봉안(奉安)된 법당이 중심 예배대상이 되어 탑의 규모는 작아지고 약화되었다. 그리고 탑이 금당 앞의 중앙선 밖으로 위치하거나 성역(聖域) 밖으로 밀려나서 사원(寺院)의 한 장식품으로 변화하기도 했다.
또한 회랑(回廊)은 없어지고 성역(聖域)과 속세(俗世)의 구별이 사라지고 산곡 전체가 사찰화(寺刹化)되어 남문에 해당하는 일주문(一柱門)이 그 사역(寺域)의 시작을 상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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